Tuesday, March 1, 2011

선비 - 예와 의를 지키다

조선의 시대정신을 말할 때 한 마디로 ‘선비정신’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선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시나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대의를 위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임금에게 직언 상소를 올리는 엄청난 용기와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선비입니다. 이와 같이 사회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비의 전통은 현대에도 학생 운동 등에 그대로 계승되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합니다.

강력한 유교문화를 형성했던 조선의 시대정신을 말할 때 선비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림은 김정희의 세한도. 1844년 / 지본묵화(紙本墨畵) / 23x69.2cm / 개인 소장 / 국보 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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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와 청렴을 실천, 도덕적 모범이 되고자 노력
선비는 기본적으로 양반 계층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한문용어로는 사대부(士大夫)라고 하지요. 선비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유교의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교의 가장 높은 가르침인 인(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합니다. ‘살신성인’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학문을 닦아야 합니다. 조선의 정치가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꾸준하게 닦았기 때문에 거의 학자 수준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쟁이 심했는지도 모릅니다. 학자들은 원래 원리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깐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 학문을 자기만을 위해서 닦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쌓은 덕을 백성들과 나누어야 했던 것이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정치 전선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벼슬에 오르게 되면 그들은 임금을 도와 나라의 정치가 바르게 서게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때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야 합니다. 그러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선비들에게는 변절이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일편단심이지요. 이들은 ‘예의’로 행동을 규제하고 ‘염치’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단속했습니다. 요즘에는 이 두 가지 덕목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치를 할 때에는 절대로 사리사욕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빈낙도와 청렴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즐겨야 합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선비는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보아도 안 됩니다. 이 때문에 간혹 선비의 생활이 지나치게 비세속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정치에서 물러나면 그 다음에는 대중 속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황이나 이이 등이 ‘향약(鄕約)’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돕고, 착한 것은 권하고, 악한 것은 징계하게’ 한 것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방위 지식인이었던 선비
그런가 하면 선비들은 교양이 하늘을 찌를 만큼 학식이 높은 사람입니다. 선비는 그저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어떤 일에 임해도 그 이치를 살펴 곧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은 옛 선비들이 집이나 기계의 설계자였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비들은 집을 손수 지었습니다. 본인이 연장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퇴계가 도산서당을 지을 때 시공은 평소에 안면 있던 승려가 와서 했지만 전체 설계는 본인이 했습니다. 퇴계의 머리 속에는 집 설계도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극적인 예가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설계를 누가 했을까요? 지금처럼 건축가가 한 것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한 유학자들이 했습니다. 게다가 다산은 거중기, 즉 무거운 돌을 들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지요? 퇴계나 다산과 가장 비슷한 사람을 현대에서 꼽으라면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인문학 교수들이 집을 짓고 새로운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당시의 학문(인문학)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선비들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산어보]라는 책을 아실 겁니다. 이 책은 흑산도 근해에 사는 각종 어류와 수중 식물 155종을 분류하고 정리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누가 썼을까요? 다산의 형인 정약전 입니다. 이 책은 그가 흑산도에 유배 갔을 때 쓴 것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정약전 역시 전형적인 선비입니다. 그도 유배 가기 전까지는 바다에 사는 생물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어민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면서 집필의 필요를 느껴 쓴 것이 이 책입니다. 그는 선비로서 만물의 이치를 나름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민들이 해준 설명만 가지고도 수중 생물들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정약용. 그는 수원화성 설계 당시 거중기를 발명하였다.

선비란 이와 같이 어떤 주제를 접하든 곧 깨치고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서를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십시오. 철학을 전공한 현대 학자가 어류도감을 펴내는 일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이전에 동료들과 ‘만일 율곡이 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다면 이곳의 상황에 적응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까’ 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학을 전공한 동료가 율곡은 수주일 내로 현대의 복잡한 기술문명을 다 이해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비들의 역량이 그 정도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속적 이재(理財)를 멀리하고 ‘예(禮)’와 ‘의(義)’를 지키려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선비 예찬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선비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선비는 우선 양반이어야 하고 남자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비민중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너무 현대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전근대 사회는 어차피 신분 차별 사회였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 비판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선비가 경제 활동을 경시한다는 점입니다. 한말에 조선에 온 서구의 선교사나 여행자들은 조선의 양반들이 빈궁하면서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 놀라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비들은 경제 활동에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서는 무능해 일제 치하에서는 더 더욱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의’를 지킬수록 사회에서 더 낙오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지적들은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정신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정신이 잘못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 문제입니다. 오늘날처럼 혼탁한 사회에는 이런 비세속적이지만 고결한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재(理財)만 밝히는 현대 사회에서 선비는 분명 그리운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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