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수원화성 - 조선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

수원 화성은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1997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습니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원본이 아닌 것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화성의 여러 시설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 있던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우선 일제기에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6.25 전쟁 때 시가전으로 또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장안문 같은 경우는 윗부분인 문루가 반 이상이 날아갔고 포루와 공심돈으로 불리는 성벽 위의 건축물 등도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은 1975년 이후에 시작된 복원 공사의 결과입니다.

현재의 수원 화성은 6.25 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시공에 대한 완벽한 기록,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복구
이와 관련해 유네스코 한국본부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측의 요청에 따라 화성에 온 심사관들은 처음에 아주 의아한 얼굴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복제품을 가지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생각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 측이 제시한 것이 그 유명한 <화성성역의궤>이었습니다. 이 책은 화성 건축에 관한 완벽한 공사기록서로 한국건축사상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가진 보고서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조선의 뛰어난 기록정신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공사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데 공사 일정, 관계자 명단, 공문서, 장인 명단과 지급 노임 규정, 자재 명칭과 수요, 들어간 비용 내역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에는 특히 시설물들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圖說)이 있어 한국 정부는 이것을 바탕으로 화성을 완벽하게 복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실력으로는 이렇게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었는데 의궤가 워낙 훌륭해 완전 복원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궤를 꼼꼼하게 확인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그제야 수긍하고 등재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하게 복원이 됐는지 전문가가 아니면 복제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 건축의 대가인 김봉렬 교수에 따르면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사상 디자인적으로 볼 때 돌연변이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과거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히 뛰어난 건축물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예비 실험도 없었고 또 시행착오도 없이 이런 건축이 가능했다는 게 대단하다는 것이죠. 화성은 성이니 일차적으로 군사시설입니다. 그래서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야 하는데 화성은 물론 이렇게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군사시설이라 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특히 ‘방화슈류정’이라 불리는 동북각루를 보십시오. 성 밖에 있는 연못과 같이 보면 별서(別墅)와 같은 휴식 공간처럼 보이지 군사 시설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화성의 독창적인 디자인
화성은 그 디자인이 독창적입니다. 보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건설한 것 가운데 성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이나 성문 밖에 동그랗게 쌓은 ‘옹성’ 등이 그렇습니다. 특히 치성 위에는 전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공심돈이나 다양한 루(樓)와 대(臺) 등 여러 가지 특수시설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런 시설들은 모두 중국의 것들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또 벽돌이라는 신소재도 사용했는데 이것도 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것입니다. 그런데 획일적이고 단순, 반복적인 중국 성곽과는 달리 화성에서는 변화와 통일성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명품이라는 것이지요.

둘레 5.4Km, 40여개의 건물들이 모인 대형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계획 덕택에 공사 시간은
약 2년 반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d’n’c at ko.wikipedia.org/nagyman at ko.wikipedia.org)


게다가 이런 명품을 아주 단 기간에 완성시켰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화성은 성의 둘레가 5.4km 남짓 되고 갖가지 건물들이 40개가 넘는 대단히 큰 건축물인데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약 2년 반 만에 공사를 마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생각해볼 때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천재적인 학자인 ‘정약용’이 계획했고 뛰어난 정치가인 ‘채제공’이 건설, 감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뛰어난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라는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 대는 조선의 르네상스기라 불릴 정도로 잊혀 있었던 조선 문화가 다시 만개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채제공의 합작
이 화성의 건립에 대해서는 보통 정조가 불운하게 생을 마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단지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했다기보다는 당시의 찌든 당파정치를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그런 일을 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보통 개혁을 꿈꾸는 군주들은 수도를 이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수도에서 과도한 세를 뽐내는 권신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예 수도를 옮기는 것이죠.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묘소의 이전을 핑계 삼아 수원을 신도시로 만들고 장차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조는 이를 위해 수원에 대해서 조세나 부역의 감면, 혹은 잦은 과거의 실시, 시장의 형성 등 파격적인 조치를 합니다. 지금도 수원 갈비는 유명한데 그것은 정조가 농가에 소를 대여해주어 소시장이 커진 결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수원을 새 수도로 만들어 천도하려고 했던 정조의 의도는 그가 49세 때 돌연 사망함으로써 실현에 옮기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든 정조의 명을 받은 다산은 수많은 연구 끝에 <성설(城說)>과 같은 공사계획서를 꼼꼼하게 썼고 그것에 따라 화성을 건축합니다. 다산은 당시까지 이어온 실학을 계승하여, 북학파처럼 개방적이고 홍대용처럼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정신이 강했으며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지닌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계도 많이 만들어냅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중기입니다. 이것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크레인인데 중국 것보다 무려 4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재료인 벽돌을 사용하여 기능이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고양시켰습니다. 벽돌은 홍예문이나 공심돈 등 원형이나 곡선형 시설물들을 만드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야 튼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공사비를 보면 절반 이상을 재료의 운반비와 인건비에 썼습니다. 특히 노임은 장인은 물론 노비들에게도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우수한 기술과 노동력이 잘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화성은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발명한 거중기는 화성 축조에 사용되었다.
<출처: jjw at ko.wikipedia.org>


전투에 효율적인 시설들
화성은 평지에 만드는 평성에 산성의 전투력을 가미하여 만든 것입니다. 조선은 원래 평성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평성은 적의 침략에 극히 취약합니다. 그래서 전쟁 시 평성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정조는 이 둘을 합해서 화성에 실현시킨 것입니다. 한쪽은 팔달산과 연결시켜 산성을 만들고 평성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위에서 본 갖가지 시설을 만들어 전투에 매우 효율적으로 임합니다. 4개의 성문(이 가운데 팔달문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됨)과 그 옆에 있는 높은 감시소인 적대, 성 밖의 동태를 살피는 지휘소인 노대, 전망대면서 공격소인 공심돈, 화포 공격이 가능한 토치카 같은 포루(砲樓), 소대본부격인 포루(鋪樓), 지휘소인 장대, 그리고 치성이나 옹성 등 전투에 필요한 시설들이 끝이 없습니다. 화성을 이렇게 작은 지면에 다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화성을 통해 우리에게는 지금으로부터 약 2백여 년 전에 이렇게 훌륭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조선은 그렇게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창조적인 힘을 지녔던 나라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팔달산과 연결된 부분에는 산성을 짓고 평지 영역에는 전투 시설과 방어 시설을 구성하여
공격에 쉽게 함몰되지 않도록 축조되었다. <출처: nagyman at ko.wikipedia.org>

물가풍경 무늬 정병 - 국보 92호

청동으로 만들어진 국보 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을 처음 보게 되면, 정병 전체를 뒤덮고 있는 초록색 표면에 먼저 눈길이 가게 된다. 금속 재질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원래부터 그런 색이었다고 오해하기 쉽다. 문화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언뜻 색깔만 보고 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일 먼저 우리 눈에 띄는 초록색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바로 청동이 부식된 녹이다. 바탕 재질인 금속을 부식시키는 녹이 이 정병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는 점은 사실 모순이다.


정병, 승려의 필수품
정병 몸체를 보면 버드나무나 갈대가 자라는 섬들이 점점이 놓여 있고, 섬 주변 물가에는 새들이 여기저기서 헤엄치고 있다. 또한 새들 사이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으며, 저 먼 하늘에는 줄지어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인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이 장면들은 몸체에 홈을 낸 다음 0.5밀리미터 굵기의 얇은 은사를 그 안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은 은사도 녹이 슬어 검게 보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어두운 바탕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은사가 이 무늬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과연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섬세한 금속공예품이다.

인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정병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가 마실 물을 담았던 휴대용 용기였다. 현존하는 인도의 정병은 첨대가 짧은 꼭지처럼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정병과는 모양이 조금 다르다. 지금 주로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정병의 형태는 당나라 구법승 가운데 하나인 의정(635-713)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가 성행한 중국 당나라 때는 인도로 가서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구하려는 승려들이 많았다. 의정은 10여 년 동안 인도에 체류하면서 본 인도와 남해 여러 나라의 불교 현황과 계율 등을 자세히 기록한 [남해기귀내법전]을 남겼다. 의정은 이 책의 여섯 번째 항목에서 물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물을 언제,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물을 담는 병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이 방법대로 만들어진 병의 형태가 지금의 정병과 유사하다. 이런 형식의 정병은 중국의 구법승들이 인도를 방문하기 시작한 기원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12세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물가풍경 무늬 정병. 정병은 승려들이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한 필수품이었다. 초록색 표면은 청동이 부식되어 나타난 색이다.

구마라집이 한역한 [범망경]에 수행 생활을 하는 승려들은 병과 발, 석장, 향로, 녹수낭 등 18가지의 물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 중 녹수낭은 물을 거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 품질이 좋은 명주나 무명으로 된 천을 사용한다. 올이 성긴 천은 벌레가 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이 천을 주구에 씌워 묶은 후 물 속에 넣으면 계율에 맞는 정수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된 승려의 필수품이 바로 정병이다.


정병과 수병
1123년 6월 중국 송나라 휘종이 보낸 사절단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도착했다. 전해에 돌아가신 예종을 조문하고 휘종의 조서를 인종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사절단의 예물 등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서긍은 체류 기간 동안 고려의 건축, 의식, 풍속 등을 살펴본 후 [선화봉사고려도경]을 저술했다. 아쉽게도 그림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12세기 전반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기명의 명칭과 모양, 용도 등을 자세히 담고 있는데, 물을 담는 용기로 정병과 수병을 언급하였다.

서긍이 묘사한 정병의 모양은 여기에서 소개한 국보 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의 형태와 매우 비슷하다. 즉 몸체의 어깨에는 두 마디로 이루어진 짧은 주구가 붙어 있고, 병목 위에는 대롱 모양의 가늘고 긴 첨대가 있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물만 담을 수 있는 이런 형태의 수병, 즉 물병을 특별히 ‘정병’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병과 수병 모두 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공예품에서 모양은 중요한 형식의 하나이고, 고려시대에 이러한 모양의 병을 정병이라고 했으므로 두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부 장식 모습. 버드나무와 섬들, 물가에서 새들이 여기저기 헤엄치고 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장면들은 
몸체에 홈을 낸 다음 0.5mm 굵기의 얇은 은사를 그 안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병
정병은 금속기 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만들어졌다. 사진은
청자로 만들어진 물가 무늬 정병(보물 344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늦어도 7세기 말 경에는 우리나라에 정병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오래된 정병은 8세기 중엽 만들어진 석굴암에 남아 있다. 몇몇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병들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금속 정병은 대부분 표면을 장식하는 문양이 없으며, 문양이 있는 경우에는 입사 기법으로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포류수금문’이 주로 표현되었다. 이 문양은 금속제 정병과 향완은 물론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보여 고려시대에 매우 유행한 문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속기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정병이 만들어졌는데, 청자에는 다양한 문양이 여러 가지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청자 정병은 음각, 양각, 상감 기법 등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포류수금문을 비롯하여 연꽃, 국화, 모란, 넝쿨무늬 등 장식된 문양도 다양하다. 이 청자 정병은 물가 풍경 중 일부를 문양 소재로 삼았는데, 갈대나 버드나무에 비해 기러기와 원앙이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도자기에서는 문양이 공예적인 도안으로 변화되어 있어 금속기의 문양과는 차이가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귀족과 관리들뿐 아니라 사찰과 도관, 민가에서도 물을 담을 때 정병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들이 계율을 지키는 승려처럼 물을 걸러서 정병에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찰 밖의 모든 계층에서 불교 의식구인 정병을 사용할 만큼 정병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하다. 아마도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에도 불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계영배" 넘침을 경계하는 잔 속에 숨은 과학의 원리

계영배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 
상도(商道)에서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이 가지고 있었다는 계영배에 새겨진 문구이다. 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속뜻이 있는 계영배는 과욕을 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계영배(戒盈杯) – 넘침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는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공자(孔子)(BC551- BC479)가 제(齊)나라 환공(桓公 ?-BC643)의 사당을 찾았을 때 생전의 환공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의기’를 보았다고 한다.

이 의기에는 밑에 분명히 구멍이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 않다가 7할 이상 채우게 되면 밑구멍으로 쏟아져 버렸다. 환공은 이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有坐之器)”라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계영배에 7할 이상 술을 채우면 밑으로 흘러 버린다.


계영배의 구조를 살펴보자!

계영배는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계영배를 들여다보면 잔 밑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잔 내부를 보면 가운데 둥근 기둥이 있고 그 기둥 밑에 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계영배의 비밀은 바로 그 둥근 기둥 속에 감춰져 있다. 그 비밀은 술잔 정중앙을 싹둑 자른 단면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계영배의 가운데 기둥 안에는 빨대를 말굽 모양으로 구부려 놓은 듯한 관이 숨어 있다. 술을 적당히 부으면 기둥 밑의 구멍으로 들어간 술이 기둥 안쪽 관의 맨 위까지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술이 아래쪽으로 새지 않는다.

하지만 술을 가득 부어 기둥 속 관의 맨 위까지 차면 구부러진 말굽 위로 넘어가게 되어 술이 아래쪽으로 빠지게 된다. 이때 잔 아래 구멍으로 연결된 관은 술이 빠지는 만큼 진공상태가 되므로 관 안쪽과 바깥의 압력 차로 인해 기둥 밑의 구멍 안으로 술이 계속 들어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새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압력’에 있다. 술을 관의 맨 윗부분 높이보다 적게 따를 경우, 잔 내부의 수압과 기둥 내의 대기압이 같기 때문에 술이 새지 않는다. 하지만 술을 계속해서 따를 경우, 잔을 채운 수압이 기둥 안쪽의 대기압보다 커져, 술이 잔 밑바닥과 연결된 통로 끝까지 빨려 들어간다. 이로 인해 술이 잔 밑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계영배의 원리 – 사이펀의 원리
계영배에는 잔을 기울이지 않고도 구부러진 관을 이용하여 액체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하는 사이펀의 원리가 담겨 있다. 사이펀(siphon)이란 옮기기 위험하거나 힘든 액체를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하여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연통형의 관을 말한다. 그림의 A의 물이 B로 이동하는 이유는 속이 빈 원통형 막대(사이펀은 막대에 액체가 차 있어야 작동한다)의 긴 쪽(중간에서부터 꺾어진 곳)이 중력을 더 받아서 짧은 쪽보다 내려가는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공기나 물처럼, 유체의 경우 압력은 단위시간당 지나가는 유체의 부피/통과하는 단면적이 되는데, 갑자기 좁은 곳으로 많은 물질이 지나가기 때문에 압력이 강해지게 된다. 이것이 사이펀의 원리이다.

계영배의 단면.
사이펀은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하여 액체를 옮기는 관을 말한다. 
<출처: (cc) Tomia at wikipedia>


이 원리는 높은 쪽의 액면에 작용하는 대기압으로 인해 액체가 관 안으로 밀어 올려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낮은 쪽의 액면에도 대기압이 작용하고 있으나 액체를 밀어 올리는 힘은 액면의 높이 차와 같은 높이를 가지는 액체 기둥의 압력만큼 약하게 된다. 그림으로 보면 A의 물이 B로 이동하고 있다. 이유는 속이 빈 막대 중간에서부터 긴 쪽이 중력을 더 받아서 내려가는 힘이 짧은 쪽보다 강하게 작동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실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이펀의 원리
이러한 사이펀의 원리는 우리 생활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 생활에 정말 없어서는 안 될 화장실, 그 가운데에서도 수세식 변기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매일 처리하는 엄청난 양의 용변을 처리하는 수세식 변기를 보면서 어떤 방법으로 물이 내려가고 또 딱 그만큼의 양이 다시 차 올라서 일정한 수위가 유지되는지, 또 왜 더 흘러내리지 않고 있는지 궁금한 적이 있을 것이다.

수세식 변기의 단면, 노란색 부분이 사이펀이다. 
<출처: 해우소디자인님의 블로그 >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변기는 물의 낙차를 이용한 것이 대부분인데 변기 내부를 살펴보면 하수도와 연결된 부분(노란색)에 U자 형태의 관이 있는데, 이것을 사이펀이라고 한다. 우리가 변기에서 용변을 본 후 레버를 내리면 물탱크의 마개가 열려 변기 안에 한꺼번에 많은 물이 들어가고, 그 물의 압력으로 사이펀이 완전히 물로 채워지면서 사이펀 내부의 대기압이 사라지고 변기의 물과 배설물이 함께 하수구로 빠져 나가게 된다. 물이 모두 빠져 나가버린 후 변기에 서서히 물이 채워지면 물이 압력이 사이펀을 가득 채울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변기에 남게 된다.

사이펀을 넘지 못하고 남겨진 물은 하수구로부터 각종 이물질이나 악취가 올라오는 것을 막아준다. 세면대와 싱크대의 배수파이프를 U자나 P자로 만들어 구부러진 곳에 물이 고이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이외에도 수동식 주유 펌프, 어항세척기, 정수처리용 여과기, 오수처리장의 슬러리 이송펌프 등 사이펀의 원리가 적용된 제품들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거중기"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강력한 크레인

수원 화성은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1997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습니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원본이 아닌 것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화성의 여러 시설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 있던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우선 일제기에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6.25 전쟁 때 시가전으로 또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장안문 같은 경우는 윗부분인 문루가 반 이상이 날아갔고 포루와 공심돈으로 불리는 성벽 위의 건축물 등도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은 1975년 이후에 시작된 복원 공사의 결과입니다.

현재의 수원 화성은 6.25 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시공에 대한 완벽한 기록,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복구
이와 관련해 유네스코 한국본부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측의 요청에 따라 화성에 온 심사관들은 처음에 아주 의아한 얼굴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복제품을 가지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생각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 측이 제시한 것이 그 유명한 <화성성역의궤>이었습니다. 이 책은 화성 건축에 관한 완벽한 공사기록서로 한국건축사상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가진 보고서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조선의 뛰어난 기록정신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그야말로 공사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데 공사 일정, 관계자 명단, 공문서, 장인 명단과 지급 노임 규정, 자재 명칭과 수요, 들어간 비용 내역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에는 특히 시설물들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圖說)이 있어 한국 정부는 이것을 바탕으로 화성을 완벽하게 복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실력으로는 이렇게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었는데 의궤가 워낙 훌륭해 완전 복원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궤를 꼼꼼하게 확인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그제야 수긍하고 등재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하게 복원이 됐는지 전문가가 아니면 복제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 건축의 대가인 김봉렬 교수에 따르면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사상 디자인적으로 볼 때 돌연변이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과거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히 뛰어난 건축물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예비 실험도 없었고 또 시행착오도 없이 이런 건축이 가능했다는 게 대단하다는 것이죠. 화성은 성이니 일차적으로 군사시설입니다. 그래서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야 하는데 화성은 물론 이렇게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군사시설이라 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특히 ‘방화슈류정’이라 불리는 동북각루를 보십시오. 성 밖에 있는 연못과 같이 보면 별서(別墅)와 같은 휴식 공간처럼 보이지 군사 시설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화성의 독창적인 디자인
화성은 그 디자인이 독창적입니다. 보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건설한 것 가운데 성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이나 성문 밖에 동그랗게 쌓은 ‘옹성’ 등이 그렇습니다. 특히 치성 위에는 전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공심돈이나 다양한 루(樓)와 대(臺) 등 여러 가지 특수시설이 설치되었습니다. 이런 시설들은 모두 중국의 것들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또 벽돌이라는 신소재도 사용했는데 이것도 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것입니다. 그런데 획일적이고 단순, 반복적인 중국 성곽과는 달리 화성에서는 변화와 통일성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명품이라는 것이지요.

둘레 5.4Km, 40여개의 건물들이 모인 대형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계획 덕택에 공사 시간은
약 2년 반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d’n’c at ko.wikipedia.org/nagyman at ko.wikipedia.org)


게다가 이런 명품을 아주 단 기간에 완성시켰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화성은 성의 둘레가 5.4km 남짓 되고 갖가지 건물들이 40개가 넘는 대단히 큰 건축물인데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약 2년 반 만에 공사를 마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생각해볼 때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천재적인 학자인 ‘정약용’이 계획했고 뛰어난 정치가인 ‘채제공’이 건설, 감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뛰어난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라는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 대는 조선의 르네상스기라 불릴 정도로 잊혀 있었던 조선 문화가 다시 만개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채제공의 합작
이 화성의 건립에 대해서는 보통 정조가 불운하게 생을 마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단지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했다기보다는 당시의 찌든 당파정치를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그런 일을 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보통 개혁을 꿈꾸는 군주들은 수도를 이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수도에서 과도한 세를 뽐내는 권신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예 수도를 옮기는 것이죠.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묘소의 이전을 핑계 삼아 수원을 신도시로 만들고 장차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조는 이를 위해 수원에 대해서 조세나 부역의 감면, 혹은 잦은 과거의 실시, 시장의 형성 등 파격적인 조치를 합니다. 지금도 수원 갈비는 유명한데 그것은 정조가 농가에 소를 대여해주어 소시장이 커진 결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수원을 새 수도로 만들어 천도하려고 했던 정조의 의도는 그가 49세 때 돌연 사망함으로써 실현에 옮기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든 정조의 명을 받은 다산은 수많은 연구 끝에 <성설(城說)>과 같은 공사계획서를 꼼꼼하게 썼고 그것에 따라 화성을 건축합니다. 다산은 당시까지 이어온 실학을 계승하여, 북학파처럼 개방적이고 홍대용처럼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정신이 강했으며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지닌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계도 많이 만들어냅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중기입니다. 이것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크레인인데 중국 것보다 무려 4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재료인 벽돌을 사용하여 기능이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고양시켰습니다. 벽돌은 홍예문이나 공심돈 등 원형이나 곡선형 시설물들을 만드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야 튼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공사비를 보면 절반 이상을 재료의 운반비와 인건비에 썼습니다. 특히 노임은 장인은 물론 노비들에게도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우수한 기술과 노동력이 잘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화성은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발명한 거중기는 화성 축조에 사용되었다.
<출처: jjw at ko.wikipedia.org>


전투에 효율적인 시설들
화성은 평지에 만드는 평성에 산성의 전투력을 가미하여 만든 것입니다. 조선은 원래 평성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평성은 적의 침략에 극히 취약합니다. 그래서 전쟁 시 평성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정조는 이 둘을 합해서 화성에 실현시킨 것입니다. 한쪽은 팔달산과 연결시켜 산성을 만들고 평성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위에서 본 갖가지 시설을 만들어 전투에 매우 효율적으로 임합니다. 4개의 성문(이 가운데 팔달문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됨)과 그 옆에 있는 높은 감시소인 적대, 성 밖의 동태를 살피는 지휘소인 노대, 전망대면서 공격소인 공심돈, 화포 공격이 가능한 토치카 같은 포루(砲樓), 소대본부격인 포루(鋪樓), 지휘소인 장대, 그리고 치성이나 옹성 등 전투에 필요한 시설들이 끝이 없습니다. 화성을 이렇게 작은 지면에 다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화성을 통해 우리에게는 지금으로부터 약 2백여 년 전에 이렇게 훌륭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으면 합니다. 조선은 그렇게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창조적인 힘을 지녔던 나라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팔달산과 연결된 부분에는 산성을 짓고 평지 영역에는 전투 시설과 방어 시설을 구성하여
공격에 쉽게 함몰되지 않도록 축조되었다. <출처: nagyman at ko.wikipedia.org>

"김치" 현대 과학이 밝혀낸 김치 발효의 원리

“풋내 나는 겉절이 인생이 아닌 농익은 김치 인생을 살아라. 그런데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 그 깊은 맛을 전하는 푹 익은 인생을 살아라. 그러기 위해 오늘도 성질, 고집, 편견을 죽이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황소 고집통 분들에게 당부하는 글이다.


 
여태 후텁지근한 여름기가 감도는 팔월 초순경에, 텃밭에다 무와 배추를 심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김장감이 되더라. 참 장하다! 통배추엔 샛노란 고갱이가 그득 차고, 무는 미끈한 게 장딴지만큼 컸으니! 바로 옆에는 나중에 김치 만들 때 친구가 될 고추가 연신 익어가고 있다. 햇볕에 바짝 말리고 곱게 빻으면 매콤하니 맛있는 고춧가루가 될 거다. 잎사귀에다 나비와 나방이가 하도 알을 슬어대 농부는 애벌레 녀석들 잡느라 곱사등이가 되었지. 새~끼들! 농약을 확 뿌려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들이 먹는 곡식과 채소, 과일엔 농부의 뼈아픔이 배어 있는 것.. 스님들은 한 톨의 알곡을사리골(舍利骨)로 여긴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로 음식의 고마움을 모르면 천벌을 받는다.

김장거리


 
농사를 지으면서 밑에는 무가, 위에는 배추가 떡 하니 자라는 상상의 채소를 꿈꾼다. 밑에는 감자가 열리고 위에는 토마토가 대롱대롱 달리는 그런 식물처럼 말이지. 아무래도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는 일이라 마음이 꺼림칙하지만. 그런데 무를 심는 뜻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안다. 그렇다. 무도 먹고 무청도 먹겠다는 것이다. 늦가을 서리 내릴 무렵 무 머리에서 자른 퉁퉁하고 때깔 좋은 푸른 무청을 새끼로 엮어 그늘에 널어 말린 것이 시래기다. 시래기는 소죽 삶듯이 오래 푹 삶아 물에 우렸다가 시래기나물, 시래기찌개, 시래기 국 등 여러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그 중에서도 시래기 국은 시래기에 쌀뜨물과 된장을 걸러 붓고 통 멸치를 넣어 끓인 국이다. 국에다 밥을 통째로 말고 익은 김치를 턱턱 걸쳐 먹었으니, 먹을 것이란 사실 그것이 모두였다.

  
 
김장은 ‘침장(沈藏)’에서 유래했다 하고, 김치도 침채(沈菜)에서 나왔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치는 누가 뭐래도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금강초롱이나 열목어는 우리나라에만 나는 고유종이라 하지 않는가. 말 할 필요 없이 김치 발효의 주인공은 미생물로, 발효식품에는 김치를 비롯하여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젓갈류, 술, 식초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미생물들도 있지만 알고 보면 거의 모두 유익하다.

김칫거리는 배추나 무가 주지만 열무, 부추, 양배추, 갓, 파, 고들빼기, 씀바귀 등 일흔 가지가 넘는다. 어디 김치를 배추 하나 만으로 만드는가? 무를 숭덩숭덩 잘라 채를 치고, 마늘, 생강, 고춧가루, 소금, 간장, 식초, 설탕, 조미료 등 갖은 양념은 기본. 아미노산이 그득한 멸치젓, 어리굴젓, 새우젓에다 호두, 은행, 잣 등의 과일류는 물론. 생고기인 북어, 대구, 생태, 가자미들까지 넣는다. 생선 단백질이 발효된 것이 젓갈이고, 김치에서도 그런 과정이 일어난다. 김치를 마냥 절인 푸성귀 정도로 여기지 말지어다. 여러 비타민에다 고른 영양소, 유산(젖산)까지 그득 들어있는 종합 영양 식품인 것. 게다가 김치가 사스(SARS), 조류독감바이러스(AI)까지 잡는지라 세상 사람들이 홀딱 반해 난리들을 피운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이 김치에서 찾아도 좋다. 힘 줘 말하지만 김치를 먹지 않으면 한국인이 못 된다. 우리가 꿀릴 게 뭐가 그리 있는가. 몸에서 마늘, 김치 냄새 좀 나면 어때… 쓸데없이 뻐기는 자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긍심,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한다는 것.

다양한 김치의 세계(왼쪽 상단부터 고추잎김치, 민들레김치, 오이소박이,
더덕김치, 보쌈김치, 열무김치)
  

 
이제 김장을 할 차례다. 배추에 소금을 듬뿍 뿌려 착착 포개 밤샘을 하고 나면 적당히 절여지면서 숨이 죽는다. 농도가 짙은 바깥으로 물이 빠져 나오니 세포에 ‘원형질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소금 먹은 배추를 일일이 맹물로 깨끗이 씻는다. 앞의 여러 김장거리를 매매 버무려서, 배춧잎 한 장 한 장 들쳐 사이사이에 척척 집어넣어 예쁘게 오므린 다음 독에다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대부분의 미생물은 소금에 절일 때 죽어버리지만 염분에 잘 견디는 내염성 세균 인 유산균(乳酸菌, 젖산균, lactic acid bacteria)들만 남아서 김치를 익힌다. 두말할 필요 없이 채소에 묻어있던 미생물들이 발효의 주인공들이다. 김치를 김칫독에 넣고 김칫돌로 꼭꼭 눌러 공기를 빼낸다. 김치에 사는 유산균들은 산소가 있으면 되레 죽어버리는 혐기성세균 이기에 산소를 다 없애버린다. 즉, 염분에 견디면서 산소를 싫어하고, 낮은 온도를 좋아하는 유산균들 만이 살아남는다. 참고로, 여행 가서 김치를 며칠 먹지 못하면 그것 생각이 무척 난다. 그럴 때는 유산균이 많이 든 요구르트를 먹으면 욕구를 덜게 된다. 김치 국물에 든 젖산과 요구르트의 것이 비슷한 탓이다.

김장: 배추를 절이고, 김치속을 만들어 배추에 버무린다
  

 
독 안의 유산균들이 천천히 번식을 하게 되니, 이게 ‘김치발효’다. 그렇지 못 하고 세균들이 재료를 썩힐 때 ‘부패’라고 한다. 채소나 양념에 든 양분을 이용하여 유산균이 번식하면서 유기산을 많이 내 놓으니 이것이 침을 나오게 하고, 김치의 특유한 맛과 향을 낸다. 이때는 다른 미생물들은 힘을 못 쓰고 유산균들만 판을 치니 말 그대로 유산균세상으로, 물론 한 종의 유산균이 아니고 여러 가지 유산균들이 득실거린다.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이런 상태가 얼마 지나다 보면 산도(pH값)가 떨어지면서(시어지면서) 어느 순간 이들 유산균들이 맥을 못 추고 시들시들해지는 때가 온다.

맛있게 익은 김치

아주 잘 익은 김치에는 유익한 유산균이 99%요 다른 세균이나 곰팡이가 1%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치가 시어지면서 유산균이 점점 죽어서 줄어들고, 따라서 여태 꼼짝 못하고 숨어 지내던 곰팡이무리(효모)들이 득세하면서 김치에서 군내가 나고 국물이 초가 되어간다. 일종의 부패다. 그러므로 아주 시어진 묵은 김치, 묵은지(漬,김치)에는 유산균이 다 죽는다.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반 정도, 아니 그 이상이 아파트에 살지 않을까? 큰 탈났다, 겨울에 김칫독을 어디에 묻는단 말인가? 앞에서 유산균은 온도에 민감하다 했다. 그래서 온도를 낮고 일정하게 유지하여 유산균들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을 개발하였으니, 세상에 없는 ‘한국고유종’인 김치냉장고다.

김칫독을 응달에 묻었을 때 겨우내 독 속의 온도가 거의 변하지 않고, 영하 1℃ 근방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흉내를 낸 것이 김치냉장고라는 발명품 아닌가! 하긴 여느 발명품치고 필요의 산물 아닌 것 없고,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것 없다!


 
그렇다, 묵은지에 침이 동하는 것은 한국인의 특유한 김치유전자가 발현한 탓이다. 그 유전물질을 갖지 못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냄새에 코를 막고 구역질을 한다. 아무튼 이렇게 김치 하나에도 푹 익은 발효과학이 들어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은 김치에 살고 있는 미생물을 세세히 다 알지 못하고 있다. 오묘한 미생물의 세계라, 김칫독 안의 생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것을 다 알아낸다면 그 세균들을 순수분리하고, 잘 키워서 김치 담글 때 넣어주면 더 맛있는 김치, 시지 않는 김치 맛을 볼 수도 있을 텐데. 김치의 비밀 하나도 제대로 밝히기 어렵다 하니 ‘자연에 숨어있는 비밀’은 정말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