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신기전" 오늘날 로켓의 원리를 보여주는 전통 로켓 과학

신기전은 15세기 최고 첨단과학 무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여진족으로부터 우리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서 새로운 화약 무기인 ‘신기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불과 35년 전만 해도 신기전은 단지 신호용 화약 무기였다고 알려져 왔지만, 지금은 신기전이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의 로켓 무기였다는 데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신무기 개발엔 언제나 첨단 과학 기술이 필요하다. 신기전을 통해 우리나라의 전통 로켓과학을 들여다보자.


세계최초의 로켓은 금나라의 비화창
세계최초의 로켓 무기는 중국 금나라가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비화창(飛火槍)이란 화약 무기다(1232년). 비화창은 길이 40cm의 종이통에 흑색화약을 넣은 것으로 길이 2.5m의 화살대 앞에 묶어 쐈다. 비화창은 적진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나서 불을 내 뿜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기였다. 중국에서는 17세기 이후 이와 같은 로켓추진 화기를 불화살이라는 뜻의 화전(火箭)으로 불렀다.

1621년 중국에서 편찬된 [무비지(武備志)]란 무기 책에는 16종류의 로켓 화기가 나온다. 화살대의 길이는 30cm에서 1.2m 정도다. 발사방식도 한 번에 1발씩 발사하는 것에서 한 번에 100발씩 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무비지의 기록은 그 내용이 자세하지 않아 복원이 어렵다.

1621년 중국에서 편찬된 [무비지]에 나오는 로켓 화기(왼쪽)
1474년 편찬된 병기도설의 신기전 설계도 (오른쪽)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은 고려 최무선 장군이 만든 주화
우리나라 최초 로켓은 최무선 장군이 1377년 화통도감에서 만든 ‘주화(走火)’다. ‘달리는 불’이란 뜻이 있는 주화는 최무선이 중국의 화약 무기를 본떠 만든 18종의 화약 무기 중 하나다. 주화는 화살대 앞부분에 약통을 붙였다. 약통은 종이를 말아서 만든 통에 화약을 넣은 것이다. 주화의 크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세종 때 소신기전으로 발전한 점으로 미뤄 소신기전과 같은 크기인 길이 110cm에, 화살의 앞부분에 로켓추진기관인 약통이 붙어 있는 형태로 추측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화를 만들기 전에 아라비아에서 로켓 추진식 화기를 만들었고 이탈리아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로켓 추진식 화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주화는 세계에서 3~4번째로 개발된 로켓으로 추정된다. 주화는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의 북방영토 회복에 발맞추어 조선 세종 때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의 로켓인 신기전은 소∙중∙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 모두 4가지
세종 29년(1447년)에는 소∙중∙대주화가 개발돼 사용된다. 이어 세종 30년(1448년)에는 신기전(神機箭)으로 이름이 바뀌어 사용된다. 신기전의 상세한 자료는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남아 있다. [병기도설]에는 소∙중∙대신기전 이외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이 추가돼 신기전의 종류는 모두 4가지로 구분된다.

소신기전은 길이 110cm의 화살 앞부분에 약통이 붙어 있는 크기이다. 약통의 크기는 길이 15cm, 바깥쪽 지름이 2cm이다. 하나의 소신기전 약통엔 20g의 화약이 채워져 있다. 최근의 복원 발사시험으로 미뤄볼 때, 지면과 60도로 발사하면 평균 150m의 비행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소신기전의 쇠 촉에는 독약을 묻혀서 사용하였다.

소신기전(위), 중신기전(아래)의 구조, (단위 mm) 
① 화살대 ② 종이약통 ③ 화살촉 ④ 깃털 ⑤ 소발화통(폭탄)
 

중신기전은 약통의 앞부분에 ‘소발화(小發火)’라는 작은 폭탄이 달렸다. 화살대는 길이 145cm, 약통 길이 20cm, 반지름이 3cm이다. 목표지점으로 날아가 약통 앞부분에 달린 소발화가 폭발하도록 설계됐다. 소발화는 종이를 원통형으로 만들고 화약을 넣고 양끝을 막아 사용하는 폭탄이다. 화약에는 쇳가루가 들어 있어 폭발할 때 파편 역할을 한다. 중신기전은 발사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발사대나 화살통에서 1발씩 발사된다. 1451년 문종(文宗)때 화차(火車)가 개발되면서 한 번에 100발씩 쏠 수 있도록 개량됐다. 복원된 중신기전 발사실험에서 50g의 흑색화약을 넣고 60도 발사했을 때 250m를 비행했다. 중신기전은 소신기전보다 멀리 날아가고 작은 폭탄까지 달려 전투에서 무척 효과적인 화약 무기였다.

대신기전의 구조 ① 대신기전 발화통(폭탄) ② 약통(로켓엔진) ③ 안정막대(대나무) ④ 깃털,
산화신기전은 대신기전발화통 대신 지화통(2단 로켓)에 소발화통을 묶어 사용했다. (단위 mm)
 

대신기전은 길이 5.3m의 큰 대나무 앞부분에 길이 70cm, 지름 10cm의 대형 약통이 달렸다. 종이로 된 약통에는 최대 3kg의 흑색화약을 채운다. 약통의 앞부분에는 길이 23cm, 지름 7.5cm의 대신기전 발화통이란 대형 폭탄이 달렸다. 이 폭탄은 목표물 도착 전후에 점화선에 의해 자동으로 폭발하도록 설계돼 있다. 사정거리는 600~700m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대신기전은 압록강과 두만강 중류지방에 있던 4군 6진에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신기전은 중신기전에 비해 60배나 많은 흑색화약을 써야 했고, 당시 가장 큰 대포였던 장군화통(將軍火筒)보다도 3배나 많은 화약을 사용하는 등 너무 많은 화약 소모량 등으로 인해 수명이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산화신기전은 ‘불을 흩뜨리는 신기전’으로 대신기전 약통의 윗부분을 비워놓고 그곳에 로켓의 일종인 지화통(地火筒)을 소형 폭탄인 소발화통과 묶어 사용하였다. 지화통은 종이를 말아서 만들었으며 길이는 13.5cm, 지름은 2.5cm로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약통의 중간 정도 크기다. 지화통은 땅에 묻어놓고 적이 접근하면 불을 붙여 하늘로 불을 뿜게 하여 적을 도망가게 하는 로켓 화기의 한 종류이다. 2009년 11월 27일 산화신기전 발사실험에서 비행 중 2단 로켓인 지화통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산화신기전은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며 500~600m를 비행해 내려가면서 지화통이 점화되고 지화통은 소발화통이라는 폭탄과 함께 빠르게 적진으로 날아가며 폭발한다.

2009년 11월 27일, 자동차성능연구소에서 있었던 산화신기전의 발사모습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약통 로켓인 신기전의 구조와 특징
신기전의 약통은 현대식 로켓의 ‘모터(motor)’에 해당한다. 종이를 말아서 만들었으며 연소가스의 분사속도를 높여주는 ‘노즐(nozzle)’이 없는 형태의 초기로켓이다. 16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로켓은 종이약통의 끝부분에 끈을 조여서 감아 만든 목을 통해 노즐 역할을 하도록 했다. 화약을 약통에 채울 땐 화약이 타들어가는 면적을 넓히고 화약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원뿔꼴의 첨철(尖鐵)위에 약통을 세운 뒤 화약을 조금씩 넣고 속이 빈 원통형 도구인 원철(圓鐵)을 이용해 망치로 다졌다.

콘래드 하스가 개발한 2단 로켓 (1529년)

신기전의 특징 중 하나는 중신기전이나 대신기전 또는 산화신기전의 앞부분에 발화통(지금의 폭탄)을 장치했다는 점이다. 로켓의 앞부분에 지금의 미사일처럼 폭탄을 장치해 발사했던 것은 신기전이 처음으로, 인류가 만든 로켓 무기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신기전은 세계 최대의 종이약통 로켓으로 추정된다. 종이약통 로켓은 1232년의 세계 최초 로켓에서 1805년 영국에서 제작된 6-파운더(Pounder) 로켓이 개발되기까지 600년간 전 세계에서 사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쓰인 종이약통 로켓 무기들과 비교하면 대신기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로켓 무기였다.

또한 산화신기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2단형 로켓이다. 산화신기전은 약통의 윗부분에 소발화통이 달린 지화통을 여러 개 설치하는데, 지화통이 바로 산화신기전의 2단 로켓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2단 로켓으로 알려진 것은 루마니아의 콘래드 하스(Conrad Haas)가 1529년 설계한 로켓이지만, 산화신기전은 이보다 80년 앞서 개발됐다.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의 신기전 설명은 아주 자세하고 정밀하다. 각 부분의 치수를 0.3mm에 해당하는 리(釐)까지 아주 정밀하게 기록했다. 각 부분의 길이와 각 부분의 길이를 모두 합한 길이를 함께 기록해 현대식 기계설계기법과 같이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 이 같은 신기전에 관한 연구는 국제우주학회(IAF, IAA)에서 1993년과 2009년에 발표돼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살상력과 적에게 큰 공포감까지 불러일으키는 신기전의 위력
신기전의 위력은 어땠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에 신기전을 쏘면 겁에 질려 스스로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칼∙화살∙창, 그리고 총포가 전부이던 시절 굉음을 내고 불을 뿜으며 날아가 폭발하는 무기의 파괴력도 무섭지만, 적에게 큰 공포를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화차를 통해 중신기전 100발을 한 번에 발사해 사거리 250m를 날아가서, 소형폭탄을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또 500~700m를 10여 초 만에 날아가 여러 개의 소형폭탄이나 대형폭탄을 터뜨렸던 대신기전이나 산화신기전의 파괴력도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무기였다.

대단한 위력을 가졌던 신기전은 세종 29년인 1447년 11월부터 문종 1년인 1451년 1월까지 3년 3개월 동안 4만여 발이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제작돼 사용됐다. 화차도 1451년에만 700여 대가 만들어져 전국에 배치됐을 정도다.

복원한 소∙중 신기전을 화차에서 발사하는 모습


2009년 네 종류의 신기전을 원형으로 복원하여, 발사 성공해
1975년 11월 역사학회에서 ‘주화와 신기전 연구 - 한국 초기(1377~1600) 로켓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우리나라에 로켓 무기인 주화와 신기전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음이 처음 알려졌다. 그리고 1980년에는 행주산성 유물기념관에 세종 때의 각종 화포와 함께 신기전 및 화차를 복원해 전시했다. 1986년에는 헝가리에서 개최된 국제우주대회(IAF)에서 신기전을 국제학회에 처음 소개했다. 1993년에는 대전 엑스포에서 노즐이 있는 모습으로 소, 중, 대신기전을 복원하였고 화차를 이용해 소∙중신기전을 처음으로 공개 발사하였다. 2009년엔 소∙중∙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등 모든 종류의 신기전을 약통에 노즐이 없는 형태인 원형대로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벌여 우리나라 전통 로켓의 위용을 완벽히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인 산화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하는 실험에 성공하였다.

"앙부일구" 태양의 움직임을 읽는 시계, 달력

아침, 점심, 저녁, 하루, 한 주, 한 달, 계절, 일 년. 이처럼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분절하는 시간의 ‘단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루 세끼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매일 해는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진다. 달은 찼다가 기울기를 반복하고, 계절마다 꽃이 피고 무더위가 오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다. 이렇듯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어지는 자연의 주기성 속에서 인간은 살아간다. 시간은 그 주기성의 기록이다.


시간과 계절에 따른 해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 해시계

해가 뜨고 지는 주기성을 이용하여 시간을 알 수 있는 도구가 해시계이다. 해의 그림자를 이용한 해시계는 나무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어 시계의 가장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예전부터 사용되던 까닭에 일상생활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시계방향(clockwise)’이란 개념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짐에 따라 그림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므로 정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물이나 기록으로 전하는 해시계는 7세기경의 신라 해시계가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천평일구(天平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 간의(簡儀), 휴대용 해시계 등이 있다.

앙부일구는 시간과 계절에 따른 해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시계다.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앙부일구를 비롯해, 신라시대에서부터 조신시대까지 우리 역사 속의 
다양한 해시계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앙부일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

앙부일구는 일명 오목해시계로 불리는데, 1434년(세종 16년)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 현 광화문 우체국 북쪽에 있던 다리)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앙부일구를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솥(釜)과 같다. 안에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에서 남으로 마주 대하게 했으며, 움푹 패인 곳에서 휘어서 돌게 했고 선을 새겨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을 그렸다. 12지신을 그린 것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한 것으로 길가에 놓아두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이로부터 백성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12지신이 그려진 것이 없고 모두 한자로 12간지가 적혀 있다.)

앙부일구의 모습(국립과천과학관 역사의 광장).


앙부일구는 시계뿐 아니라 달력 역할도 했다
앙부일구는 해 그림자가 맺히는 오목한 시반(時盤)과 그림자를 맺혀주는 영침(影針), 이들을 지지하는 4개의 다리, 그리고 다리를 받치는 동시에 물을 채워 시반을 수평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십자 모양 물받이로 이루어져 있다. 시반 면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새겨져 있고, 시반 주위는 빙 돌려서 24절기와 24방위를 새긴 지평환(地平環)이 있다. 영침과 나란한 시각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묘, 진, 사, 오, 미, 신, 유의 7개의 시(時)가 적혀 있다. 영침과 직각으로 절기선을 13개 새기고 24절기를 새겨 넣었는데 오른쪽 맨 위부터 그림자가 가장 긴 동지부터 가장 짧은 하지까지 새겨 표시하였고 왼쪽 밑에서부터는 나머지 하지에서 동지까지 계절을 차례대로 표시하였다.

태양은 계절, 지방에 따라 남중고도가 달라진다. 태양의 남중고도는 ‘90° - 위도’가 되며, 지구 자전축이 23.5° 기울어져 있어 이 값에 춘·추분은 0°, 동지는 -23.5°, 하지 때는 +23.5°를 더하면 그 계절의 남중고도가 된다. 즉, 서울(위도 37.5°)을 기준으로 태양의 남중고도는 춘추분에는 52.5°, 하지 76°, 동지 29°이다. 겨울에는 집 안 깊숙이 햇빛이 들어오고, 여름에는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있어 그림자가 길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앙부일구는 가로글씨를 읽으면 시각이, 세로글씨를 읽으면 계절을 동시에 알 수 있어 시간을 재는 시계인 동시에 일년의 날짜와 절기를 알아보는 달력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 표준시는 해시계보다 32분 빨라

한국 표준시 KST(Korea Standard Time)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각인 세계협정시(세계표준시 UTC /GMT )에 9시간을 더하면 된다. 즉, 경도 15°마다 1시간씩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표준시는 현재 135°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135°는 일본의 표준시의 기준이며, 실제 135°는 일본 고베 근처와 러시아의 하바로브스크를 지나는 자오선이다.)

우리나라 표준시는 4차례의 변화를 거쳐왔다. 1908년 4월 1일 대한제국은 서울을 기준으로 한 127.5°를 표준시로 사용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1월 1일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동일한 135°로 기준을 바꾸었다. 해방 이후 1954년 3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기준으로 한 127.5°로 환원하였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8월 7일 다시 동경 135°로 표준시가 변경되었다.

국가의 표준자오선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1시간 단위 차이가 나도록 구분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표준시는 4차례 변화를 거쳐 현재 135°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출처: CIA>


일반적으로 국가의 표준자오선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15°의 배수, 즉 정수 시간(1시간 단위) 차이가 나도록 하고 있다. 164개국 중 97%가 정수 시간차로 표준시를 설정하고 있다. 1961년에 표준시를 변경한 배경 중 하나도 이런 이유이다. 그래서 현재 사용하는 표준시는 실제 시간보다 정확히 32분 빠르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제시한 서울의 경도는 126°59’으로 즉 서울과 일본의 경도 차이는 8°가 되어, 32분의 시차가 있다.) 즉 해시계로 측정한 시간에 약 30분을 더해야 현재 이용하는 시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실제 자연의 시간보다 30분 당겨 생활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의미로 보면 일년 내내 30분의 일광 절약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기리고차" 톱니바퀴의 원리를 이용한 거리측정장치

[세종실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17일, 왕과 왕비가 온수현으로 가니, 왕세자가 호종(扈從)하고 종친과 문무 군신 50여 명이 호가(扈駕)하였다. 임영대군 이구, 한남대군 이어에게 수궁(守宮)하게 하고, 이 뒤로부터는 종친들에게 차례로 왕래하게 했다. 임금이 가마골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여기서 온수현은 지금의 온양이고, 세종은 왕비, 세자와 더불어 온천에 가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처음으로 기리고차 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리고차란 무엇일까?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장치로, 현재 국립과천과학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거리측정장치 기리고차
기리고차는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 수레이다. 장영실(蔣英實)은 왕명을 받아 중국에 유학하며 기술을 배워서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다. 세종 때 각도 각읍 간의 거리를 조사하여 지도를 작성하는데 기리고차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문종 1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지역의 제방공사를 시작함에 앞서 그 거리를 기리고차를 이용하여 재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목공사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측량 및 지도 작성 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측정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나 막대기를 가지고 재는 척측법이나 발자국으로 재는 보측법을 이용하였다. 이후에는 약간 더 발전된 승량지법을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새끼줄로 측량을 했고 후기에는 새끼줄이 신축성이 많아서 노끈이나 먹줄 등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오차가 많아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척(尺), 보(步), 리(里)를 주로 사용하였다. 흔히 쓰는 자는 일반적으로 주척(周尺)을 썼다. 주척의 단위는 ‘6척을 1보, 360보를 1리’라 하여 3,600보를 10리(약 4㎞)로 나타냈다.

과학자 장영실이 왕명을 받아 기리고차를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개량하였다.


기리고차의 원리

한국 최초의 반자동 거리 측정기구인 기리고차에 대해서 1441년 제작 당시의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저서 [주해수용]에 그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거리측정은 바퀴의 회전수에 따라 울리게 되어 있는 종과 북의 소리를 헤아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기리고차는 톱니바퀴를 통해 바퀴의 회전수를 감속하는 원리를 이용하여 거리를 측정한다.
 

기리고차는 수레바퀴의 중간에 철로 만든 톱니바퀴가 있는데 톱니가 10개 설치되어 있다. 아래바퀴에는 120개의 톱니가 설치되어 있어 이것으로 수레바퀴의 축에 있는 톱니바퀴와 서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면 같은 축에 있는 톱니바퀴도 한 바퀴 돌고 톱니가 10개니까 맞물려서 아래바퀴의 톱니가 10개 돌아가 아래바퀴는 1/12 바퀴가 돌게 된다. 수레바퀴가 12바퀴를 돌면 아래바퀴는 1바퀴를 돌게 된다.

마라톤 경기의 거리 측정에 쓰이는 존스 카운터 역시 
기리고차와 같은 원리로 거리를 측정한다. <출처 : Op. Deo at en.wikipedia>

아래바퀴의 축에는 톱니가 6개인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있다. 이것과 연결된 중간바퀴는 톱니가 90개다. 그래서 아래바퀴가 15바퀴 돌면 중간바퀴는 1바퀴 돈다. 중간바퀴의 축에는 톱니가 6개인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있고 이것과 연결된 윗바퀴는 톱니가 60개다. 그래서 중간바퀴가 10바퀴 돌면 윗바퀴는 1바퀴 돈다. 기리고차 수레바퀴의 둘레가 10자인데 수레바퀴가 12번 회전하면 아래바퀴는 한 번 회전하여 120자를 측정하고 아래바퀴가 15번 회전하면 중간바퀴가 한 번 회전하여 1,800자를 측정한다. 중간바퀴가 10번 회전하면 윗바퀴가 한 번 회전하여 18,000자를 측정하게 된다(세종은 1430년 표준척을 제정하였는데, 이때 1자를 약 20.81㎝라고 했다. 6자를 1보라 했고, 다시 300보가 되면 1리라고 했으니, 1리를 계산해보면 20.81㎝×6×300 = 374.58m였다.).

결론적으로 수레가 1/2리를 가면 종을 1번 치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에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올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다.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렇게 들리는 종과 북소리의 횟수를 기록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던 것이다.

그럼 세종이 온양 온천 행차 때 타고 간 기리고차는 과연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의 북소리를 냈을까? 현재 서울 경복궁에서 아산까지의 거리는 약 103㎞이다. 당시의 10리가 약 3.74㎞였던 점을 감안하면, 세종이 온양 행차에 끌고 간 기리고차는 10리를 알리는 두 번의 북소리 신호를 약 27번 정도 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과학적 문자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즉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1910년대 초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이란 크다는 것을 뜻하니, 한글은 ‘큰 글’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 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입니다. 이 책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의 공입니다. 선생은 아주 비싼 가격으로 이 책을 샀고 6∙25 때에도 이 책 한 권만 들고 피난 갈 정도로 이 책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분입니다. 이 분도 [직지]를 세계에 알린 박병선 선생처럼 우리의 문화영웅입니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있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이유 아직 잘 모르고 있어
한국인들에게 과거 유산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열이면 열 모두 한글을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대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기 때문” 또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므로”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배우기 가장 쉬운 문자라서”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우선 한글이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문자는 그 나라 말만 정확하게 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로는 영어의 ‘f'나 'th'를 적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 있는 램지(Ramsey) 교수는 한글날에 학생들과 조촐한 자축연을 했답니다. 이렇게 멋진 문자가 나온 날을 축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한글이 ‘과학적’인지 잘 모릅니다.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것도 이같은 ‘한글의 과학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인류 문자 발달의 정점에 서 있는 우리 한글
한글은 그 치밀함과 복잡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인류의 문자 발달사를 간단하게나마 살펴야 합니다. 인류는 알다시피 한자 같은 상형문자로 언어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글자 수가 많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문맹률이 높았던 것이죠. 예를 들어 ‘西’자는 음이 ‘서’인 것을 대부분 알지만 이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茜’자는 음이 ‘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일본 문자 같은 음절(syllable) 문자를 만들어냅니다. 일본어도 표음 문자입니다만 자음과 모음이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자의 ‘加’에서 따온 히라가나의 ‘か(카)’는 자음과 모음을 분리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글로는 ‘ㅋ+ㅏ’로, 로만 글자로는 ‘k+a'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글이나 로만 글자가 더 진보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한글과 영어의 진화 정도가 같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 백성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이 담겨 있다.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 따 만든 자음, 위대한 과학성을 반증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쓰는 법. 한글은 과학적으로 창제되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이제부터 한글의 과학성이 나옵니다. 어떤 외국인이든 대학 정도의 학력이면 1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한글로 배워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외국어를 한 시간 만에 배워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을까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글의 자음부터 볼까요? 한글의 자음에서 기본 되는 것은 ‘ㄱ∙ㄴ∙ㅁ∙ㅅ∙ㅇ’인데 국어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지 이것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자음은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하나 더하거나 글자를 포개는 것으로 다른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ㄱ·ㅋ·ㄲ’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앞 글자 다섯 개만 알면 다음 글자는 그냥 따라옵니다. 그런데 이 다섯 자음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자들은 발성 기관이나 그 소리 나는 모습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ㄱ"은 '기역' 혹은 '그'라고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이것은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라 ‘ㅇ’ 같은 경우는 목구멍의 모습을 본 뜬 것이지요. 그래서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배우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한 시간 안에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건 이런 원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까지 생각해 만든 글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어의 ‘city'는 ’시티‘보다는 ’시리[siri]‘라고 발음되지요? 또 ’gentleman'은 통상 '제느먼[ʤénmən]‘으로 발음됩니다. 이것은 t라든가 r, n은 같은 어군이라 서로 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영어 글자들은 그 생김새에 아무 유사성이 없지요? 그래서 다 따로 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이 글자들이 모두 혓소리(설음, 舌音)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고 같은 군에 모아두었습니다. 즉 ‘ㄴ·ㄷ·ㅌ·ㄸ(ㄹ은 반혓소리)’이 그것으로 글자의 형태들을 유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과학적 원리에 따라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천지인 3개의 기호만으로 모음을 표현해
모음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그 복잡한 모음 체계를 어떻게 점(ㆍ) 하나와 작대기 두 개(ㅡ, ㅣ)로 끝낼 수 있었을까요? 가장 간단한 것으로 가장 복잡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 ‘ㆍ, ㅡ, ㅣ’에는 각각 하늘∙땅∙사람을 뜻하는 높은 철학까지 담겨 있습니다. 한글은 이렇게 간단한 모음 체계로 가장 많은 모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천재적인 창조성 때문에 우리 한글은 휴대폰에서도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자판에 한글을 다 넣어도 자판이 남아돌아가니 말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문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반포 450년 후에나 우리 글로 인정받은 한글, 앞으로 더욱 아끼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글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한글이 국문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반포 450년 후인 갑오경장(1894년~1896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기에 어려운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왔는데, 지금은 영어 때문에 영 맥을 못 춥니다. 영어는 못 배워 야단인데 한글(한국어)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말과 글은 쓰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한글을 지금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보았습니다마는 한글은 여기서 설명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위대한 문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08년에 재현한 훈민정음 반포의례